Ⅰ. 머리말
한국의 근대사는 대내ㆍ외적으로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른 외세의 개항요구와 국내 정치세력들의 분열 및 미약한 기반아래 마침내 식민지적 모순에 빠져들었던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의 근대는 중세 왕조정치의 몰락과 함께 각성된 민중의식이 살아나고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극심한 사회변동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변동에 대한 대응양상은 그 세력을 형성하는 기반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데, 특히 종교운동은 그 주요한 사회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근대 사회변동에 따른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본다.
조선후기 종교운동의 분화와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實學) 혹은 보유론(補儒論) 운동과, 피지배층으로서의 민중계층에서 나타난 민중중교운동 그리고 유교적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위정척사운동 등이 주요한 유형이다. 이 가운데 민중종교운동은 그동안 지배층으로부터 억압과 수탈만을 받아 왔던 소외계급인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전개된 운동으로서 당시의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고 개벽된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그 밖의 종교운동들과는 구분된다. 민중종교는 개념상 그 종교성을 민중의 심성에 환원시키고 민중의 하층민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고 참된 종교로서의 ‘하향성 가치관’을 지닌다고 본다. 이러한 민중종교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날 한국신종교 운동사와 관련해서 근대에는 최수운(1824~1864)의 동학(東學)을 기점으로 등장한 김일부(1826~1898), 나홍암(1863~1916), 강증산(1871~1909), 박중빈(1891~1943) 등의 선각자들을 중심인물로 꼽고 있다.
한국 근대의 민중종교운동은 또한 그 성격상 민족운동으로서의 특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독립을 열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일제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나 민족의 자력갱생과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을 희구하는 민중의 바램이 종교활동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중종교는 민족종교로서의 정체성도 지닌다. 이 시기 한국의 민족종교는 특이하게도 세계의 어느 국가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적인 맥락을 드러내었다고 본다. 즉 민족종교란 한민족의 단일운명공동체 의식이 포함된 종교로서 혈연, 지연, 역사, 운명 등에서 동일한 심정적 개념을 내포한 것을 말한다. 36년간의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이와 같은 민족의식은 더욱 고취되었으며 종교운동에서도 신앙과 결합되어 한민족의 심정에 뿌리 깊게 자리잡았던 것이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상의 종교운동에서 하나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증산교단의 민중운동 혹은 민족운동에 대해서이다. 강증산은 구한말에 활동한 종교적 선각자로서 오늘날 한국 신종교 교단의 많은 분파를 낳았다. 특히 일제치하에서는 유사종교단체로 규정되어 일본총독부로부터 많은 수난을 겪었으며, 일본의 아시아 침략야욕이 거세어짐에 따라 마침내 종교단체가 해산되는 아픔도 겪었다. 강증산의 화천(化天)후 그를 직접적으로 따랐던 친자종도와 개인적 계시체험에 의해 종통을 세웠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교단을 창설하였다. 그 중에서도 몇몇 교단은 신앙의 힘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의 구원과 민중의 각성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민중ㆍ민족운동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근대 100년의 사회변동과 종교적 대응을 살펴볼 때 이러한 증산교단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그 주요한 운동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신종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심화하고 민족문화의 가치를 함양하는 데 기여하리라 본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증산교단의 창립과 활동의 신앙적 근거가 되는 강증산의 생애와 그 민족사상을 살펴보고, 이어서 일제하 주요한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을 개관하며, 끝으로 증산교단의 운동에 나타난 종교적 성격을 종합적으로 서술해보기로 하겠다.
Ⅱ. 강증산의 생애와 민중ㆍ민족사상
1. 강증산의 생애
수많은 증산교단의 창립과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강증산(姜甑山, 1871~ 1909)의 탄강과 생애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여러 경전들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대체로 그의 신비한 능력과 법설은 그를 따르던 종도들로 하여금 절대적 신앙을 가지게끔 하기에 충분했으며, 특히 그의 생애에서 행한 ‘천지공사(天地公事)’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모든 종교활동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 경전에 나타난 증산의 주요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증산이 탄강한 때는 1871년 신미년 음력 9월 19일이며, 이조 고종 8년째 되던 해이다. 탄강지명의 현재 주소는 전북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새터에 해당된다. 역사적으로는 서학(西學)이 전래되고 외세의 물결이 밀려와 조선의 근대화를 부추기던 시대였고, 동학의 창시자인 최수운이 활동하다가 혹세무민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지 7년째 되던 해이다. 증산의 본명은 강일순(姜一淳)이며 ‘증산(甑山)’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어릴 적 이름은 사옥(士玉)이라고 하였다. 부친의 성함은 강문회(姜文會)이며 모친의 성함은 권양덕(權良德)이다. 모친이 태기가 있은 지 열 석달만에 증산이 탄강하였다고 전한다.
유년시절 증산의 성품은 원만 관후하고 총명하였으며 지극히 작은 곤충 하나도 함부로 해치지 않을 정도로 호생의 덕이 두터웠다. 그리고 어릴 적에 지은 시구(詩句)에서 “멀리 발을 내딛으면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지르면 하늘이 놀랄까 두렵다(遠步恐地坼大呼恐天驚)”라고 하여 그 기상이 보통 사람과 달랐음을 알게 해준다. 남달리 총명하였다는 것도 항상 서당에서 장원하였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잃어버린 모시베를 다시 찾은 일, 그 기력이 출중하여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 돌리듯이 한 일, 부친의 빚을 지혜로써 갚은 일등의 일화가 전해온다.
장성하여서의 기록은 주로 갑오 동학혁명(1894)을 전후로 한 유력(遊歷)생활을 담고 있다. 이 때 증산은 흉흉한 세태를 지켜보면서 비판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올바른 처세법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비로소 광구천하의 뜻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증산은 1897년부터 1900년까지 광구천하(廣救天下)의 뜻을 품고 인심 및 속정을 살피기 위해 전국을 주유(周遊)하였다. 3년의 주유 끝에 고향 객망리로 돌아온 증산은 시루산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신이(神異)한 공부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원사에서의 49일 공부를 통해 오룡허풍의 천지대도를 열게 되었다. 이 공부를 마치고 나오자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짐승들이 반겨 맞으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하였다고 하니 증산은 이들에 대해서도 ‘후천해원’을 시켜줄 것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강증산은 더 이상 인간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몸을 지닌 채로 최고신 상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즉 증산은 구천상제의 화신(化身)으로서 그가 지닌 무소불능의 신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본래적인 사명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역사를 말한다. 경전기록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증산은 실제로 자연의 조화를 자유자재로 부리고, 죽은 자를 살린다든지, 살아있는 자의 수명을 연장시켜준다든지 하면서 절대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인용문은 증산의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하나의 총체적 신앙이 발생할 수 있었던 주요한 경전적 근거에 해당한다.
상제께서 이듬해 사월에 김 형렬의 집에서 삼계를 개벽하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이 때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서 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것을 비유컨대 부모가 모은 재산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얻어쓰려면 쓸때 마다 얼굴이 쳐다보임과 같이 낡은 집에 그대로 살려면 엎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불안하여 살기란 매우 괴로운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오.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오.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하시고 「너는 나를 믿고 힘을 다하라」고 분부하셨도다.
즉 ‘천지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오.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오.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고 하였듯이 최고신 상제가 행한 신천지 창조의 역사(役事)로서 그 위대하고 극적인 가치를 가리켜 ‘개벽’(開闢)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개벽을 주도하는 자가 바로 다름아닌 ‘강증산 상제’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증산을 추종하였던 종도들은 모두 절대적인 신앙을 지니고 오직 후천개벽이 속히 열리기만을 고대하였다. 증산의 이와 같은 천지공사는 1901년부터 시작하여 1909년까지 이어졌으며, 애석하게도 9년간의 천지공사를 마침과 동시에 화천함으로써 모든 종도들은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증산교단의 창립과 활동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2. 강증산의 민중ㆍ민족사상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증산의 생애에 나타난 그 사상적 특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증산은 그의 법설에서 민중을 위하고 민족의 자력갱생과 희망찬 미래를 예시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증산이 9년간에 걸쳐 행한 ‘천지공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증산이 언급한 민중중심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온다.
이제 해원시대를 맞이 하였으니 사람도 명색이 없던 사람이 기세를 얻고 땅도 버림을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오리라.
부귀한 자는 자만 자족하여 그 명리를 돋우기에 마음을 쏟아 딴 생각을 머금지 아니하나니 어느 겨를에 나에게 생각이 미치리오. 오직 빈궁한 자라야 제 신세를 제가 생각하여 도성 덕립을 하루 속히 기다리며 운수가 조아들 때 마다 나를 생각하리니 그들이 내 사람이니라.
상제께서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 되는 연고이니라」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김 경학의 집에 대학교를 정하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하리라」 하시고 경학을 시켜 무당 여섯명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의 관건을 벗기고 그들의 각자 앞에 청수를 떠놓고 그것을 향하여 사배를 하게 하고 시천주 세번을 제각기 따라 읽게 하셨도다. 이것을 끝내고 그들의 이름을 물은 다음에 각자로 하여금 청수를 마시게 하니 이것이 곧 복록이로다. 이것이 해원시대에 접어들어 맨 먼저 천한 사람들에게 교를 전하신 것이었도다.
「세상 사람이 나를 광인이라 이르되 광인은 일을 계획도 못하고 일을 치루지도 못하니라. 광인이라고 하던 사람이 광인이라고 듣던 사람에게 절할 날이 오리라. 나는 시골에서 농판의 칭호를 듣되 군자나 천진으로 평이 있는 자를 택하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이상의 구절들에 나타난 특징은 증산 당시의 민중들을 향한 새로운 각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지배층의 폭압에 시달리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계층에 해당하였던 민중들에게 제일 먼저 교(敎)를 전한다고 하고, 가장 기층 농민들로 하여금 후천 시대의 새역사를 주도하는 계층임을 일깨워준 것은 이 시대 종교적 선각자로서 파격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증산 당시의 조선은 19세기 중엽 이후 안으로 중세 사회체제를 극복하고 근대사회체제를 이루어가야 했으며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수호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 때 농민들은 지속된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혼란,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치권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켰으니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대표적이다. 농민들은 반외세ㆍ반봉건을 기치로 내세우고 전면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외세의 침략을 배척하고 중세사회체제를 타파하면서 자주적인 근대사회를 만들려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이었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이처럼 민중이 중심이 되어 당시의 사회변동을 주도하였다는 점은 증산의 민중사상을 통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증산의 이와 같은 민중사상의 배경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 확립에 있다. 그것은 증산이 강조한 ‘인존(人尊)’의 이념에 잘 나타나 있다.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
「선천에는 모사(謀事)가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 또 너희가 아무리 죽고자 하여도 죽지 못할 것이오. 내가 놓아주어야 죽느니라.
즉 인간은 천지의 가치보다도 크며 이 우주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특히 ‘모사(某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한다’고 한 것은 전통적인 하늘 중심의 운명론 관념과 정확히 배치되는 선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특정 지배계층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며 또한 누구에게나 정당하고 대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본다. 사회적 차별이나 경제적 불평등의 역사가 인간 본래의 평등한 가치를 훼손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한국 근대사회에서 민중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처럼 ‘성사재인’의 새로운 역사를 주도하는 핵심계층이었다고 본다.
강증산의 사상에는 또한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제국주의 세력들로부터 위협받고, 마침내 국권을 침탈당하고 민족문화가 말살되려는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이 때 종교운동은 한민족의 얼을 살리고 고난에 처한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여 새 시대의 영광을 약속하는 것으로 민중의 심정을 달래어 나갔으니 곧 민족종교운동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증산의 사상에 나타난 민족주의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의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하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 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 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뒤 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 신명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자를 너희들에게 붙여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제각기 소원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받들어 줄 것이므로 도인들은 천하사에만 아무 꺼리낌 없이 종사하게 되리라.
상제께서 매양 뱃소리를 내시기에 종도들이 그 연유를 여쭈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 이제 배에 실어오는 화물표에 따라 넘어오게 됨으로 그러하노라.」고 하셨도다.
원일은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하므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 일러주셨도다.
상제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 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위의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조선민족의 구원과 미래에 대해 아주 낙관적인 선언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한반도는 지형에서부터 명산이 많고, 민족적인 심성이 어질며,또 고래(古來)로부터 신명대접이 극진하여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우리 민족을 받들어준다고 하였다. 특히 증산이 상제로서 행한 천지공사에서 주창된 ‘해원(解冤)시대’는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는 것이므로 여기에 한민족의 구원이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장차 한민족의 국가는 세계적으로 상등국이 될 것이며, 황극신이 머무는 곳이며, 대중화(大中華)를 이루는 지상낙원이 된다. 설령 일본의 치하에 잠시 지배받는다하더라도 그것은 한민족을 대신하여 일만 할 뿐이고 때가 되면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므로 후하게 말대접이나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증산의 사상에는 근대 우리 민족이 처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제공함으로써 당시 민중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증산을 추종하던 수많은 종도들은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증산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그 고유한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본다.
다음 장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증산교단의 사례를 중심으로 민중ㆍ민족운동의 실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Ⅲ. 일제하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
1. 차경석의 보천교운동
차경석(1880~1936)은 강증산의 천지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07년에 처음 증산과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증산의 종도가 되어 열렬한 신자로 활동하였다. 특히 증산이 수부(首婦)를 천거하라고 했을 때 자신의 이종매인 고판례를 내세움으로써 후대에 증산교단 창립의 주역이 되었다. 차경석은 원래 부친이 동학교도로서 갑오동학혁명때 사형당한 이후 동학운동에 가담하였는데, 강증산을 만난 이후로 천지공사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증산에 대한 신앙을 키웠다.
1909년에 강증산이 화천하자 차경석은 한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수부였던 고판례와 함께 정읍 대흥리에 자신의 집에서 교단을 창설하게 되니 이 때가 신해년(1911년) 음력 9월 치성을 지낸 후였다. 당시의 교단명칭은 뚜렷이 제시된 바 없지만 그 교도들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세간에서는 태을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후일에 여기서 갈라져 나간 교단이나 이와 관련없이 다른 종도들과 그 문인(門人)들이 세운 교단까지도 모두 태을교라고 불러서 그 당시의 신문이나 책자에 그렇게 일컬어왔다. 보천교(普天敎)라는 명칭은 192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교단공개의 요구를 받고 공식적으로 간판을 걸게 되면서 사용되었다.
차경석이 교권을 장악한 시기는 1916년 방주제(方主制)를 제정하고 나서부터이다. 차경석은 당시의 교인대표중에서 24인을 선정하여 각각 24방주로 임명하고 연원체계를 조직케 하였으며, 고부인에 대해서는 그 거처를 격리하여 예문(禮門)이라 부르고 오직 차경석 자신을 통해서만 접견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불평을 품은 교인들은 떠나가고 고부인마저 신도들과의 접견이 불가능해지자 교단을 이탈하여 나감에 따라 모든 종교조직은 차경석을 중심으로 운영되게 되었다. 차경석은 당시 교단을 떠난 간부들이나 그 제자들의 모함으로 당시 일본경찰로부터의 수차례 심문도 받고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부터 교세는 급속히 확장되어 1920년대에 이르면 교단 간부인원만도 55만7천7백명이고 신도수는 자칭 6백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1919년 10월에 기존의 24방주제를 확대개편하는 60방주제를 시행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일제의 탄압과 종교단체해산 요구 그리고 차경석의 사망으로 교세는 급속히 하락하여 오늘날은 신ㆍ구파로 나뉘어 겨우 그 명맥만을 이어오고 있다.
일제치하 보천교의 민중적인 운동을 살펴보면 기층민중의 문화, 교육, 언론, 경제,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지금도 정읍에 남아있는 ‘보천교농악’을 들 수 있다. 당시에 일본은 조선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 일본문화에 동화시키려한데 반해 보천교는 이를 지키고 전수하는데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경석은 성전 건물뒤편에 벽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그곳에서 직접 농악을 지도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일제치하의 민중들에게 대중문화적인 구심점을 마련하고 삶의 위안을 주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 농악단은 1936년 차경석의 사망이후에 해체된 것으로 전하지만 정읍지역 농악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천교의 교육활동을 보면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한학교육에 전념하였고 한편으로는 신교육활동도 전개하였다. 보천교에서는 본소 내에 연진원(硏眞院)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교리교육외에 고전을 읽고 해독해내는 강습소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신축건물을 이용하지 못하고 대신에 서당을 설치하여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보천교의 한학교육중심은 당시의 신교육에 대한 불신도 있으며 또한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하면 더 이상 교육이 필요없다는 시각에서 금지한 측면도 있다. 한편 보천교의 신교육활동은 1920년대에 보천교 청년당이 조직되어 교리교육 외에 신지식을 교육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사숙 형태로서 차경석의 동생 차윤숙의 주창으로 ‘보흥여자사립수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오늘날의 보이스카웃에 해당하는 소년회를 조직하여 사회봉공을 위한 필요과목을 학습시키고 음악회도 개최하였으며, 당시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보천교 간부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언론활동적인 면에서는 보천교에서 창간한 하지만 이 잡지는 차경석의 간섭이 너무 심하여 제4호까지 발행하고 마침내 폐간되었다. 이후에 보천교에서는
경제활동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보천교에서는 당시에 직물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하여 옷감의 자급자족화를 꾀했다. 이 외에 갓공장, 농기계공장까지 들어서고 서양의 염색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염색기술을 권장하였고, 또한 중공업의 중요성을 깨달아 유리공장 및 제철, 제련소까지 건설하려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천교가 당시의 일본물산을 배척하고 민족적인 것을 고집하기 위해 자급자족운동을 전개하는 일환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이와 같은 경제활동은 급기야 오늘의 노동조합체에 해당하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의 형성(1924년)으로 나타났다.
사회운동의 측면에서는 당시의 형평사(衡平社)운동과의 연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형평사는 1923년 진주에서 조직되어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12년간 전개된 백정들의 신분차별 철폐운동을 위한 전국적인 조직을 말한다. 보천교에서는 교도인 조우제를 통해 형평사 창립 축하식에 축사를 하고 운동비용을 기부함으로써 백정들의 차별철폐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당시 백정들의 사회운동이 본래 증산의 사상에 나타난 평등의식과도 공명한 것으로 보고 그 연대관계를 추정하고 있다. 한편 보천교에서는 1924년에 보천교의 활동을 일본의 우호하에 전개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여기서는 대동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과 조선의 단합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일본정책에 협찬하는 운동을 약속하고 귀국하여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운동은 결국 일본의 기만적인 정책에 이용되어 보천교가 친일단체로 몰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보천교의 민족운동은 당시에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이고,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운동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보천교운동의 주요한 사건을 살펴보면 먼저 차경석의 천자등극운동을 들 수 있다. 이것은 1921년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개최한 고천제(告天祭)행사를 말하는데, 차경석은 이 때 국호를 ‘시(時)’라 하고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하였다. 이 행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하기 위한 것 혹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는데, 당시 민족운동의 시각에서 보면 일본에서 불경스러운 행위로 규정하여 집회를 막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차경석이 천자등극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자료가 많다는 것이다. 천자등극은 당시 기미독립운동이 무위로 끝난 이후에 암울했던 사회의 민중과 지식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로 많은 부호들이 보천교에 귀의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전한다.
보천교의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례로는 여러 가지 사건이 전해온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는 1918년에 제주 법정사에서의 항일투쟁이 있으며, 1920년 21년 사이에 태을교의 이름으로 신자를 모집할 때 국권회복운동을 선전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보천교에서는 1922년 고려공산당에서 세계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하고자 할 때 최팔용과 장덕수를 통해 여비 1만원을 지원했으며, 1924년 김좌진에게는 2만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무장대의 편성을 가능하게 했다. 같은 해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온 사람이 보천교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러 왔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으며 이 때 보천교는 정의부에 20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모두 보천교주 차경석의 동의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천교가 민족운동에 관계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차경석의 보천교 활동에 대해서 한민족의 경제를 침식시키고 민족독립운동을 외면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의 신문기사와 주변자료를 종합해볼 때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1925년 이후 시국대동단 사건과 함께 교단의 내분이 겹치면서 해체되기까지 사회적 인식이 엇갈리게 된 점은 보천교에 대한 양면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2. 김형렬의 미륵불교운동
강증산의 친자종도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성심으로 증산을 시봉하고 그 행적을 소상히 후대에 전한 사람이 바로 김형렬(金亨烈, 호는 太雲, 1862~1932)이다. 김형렬 또한 증산의 화천 이후에 독자적인 교단을 운영하면서 일제치하의 민족운동을 하였던 기록이 전해오므로 증산교단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형렬은 동곡에서 생장하다가 환평에 이거할적에는 부자였는데 당대에 가운이 기울어져 무척 가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형렬이 본래 증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98년대로 기록하고 있으나, 정식으로 종도가 된 해는 증산이 천지공사를 시작한 다음 해인 1902년이다. 이 때 김형렬은 증산의 성예(聲譽)를 듣고 한번 만나보기를 소원하다가 원평에서 만나면서부터 독실한 종도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전하기를 “천사(天師) 형렬(亨烈)에게 일러가라사대 이제 말세(末世) 당(當)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操心)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罪)를 멀리하여 순결(純潔)한 마음으로 천지(天地) 공정(公庭)에 참여(參與)하라. 나는 삼계(三界) 대권(大權)을 주재(主宰)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天地)를 개벽(開闢)하고 불로(不老) 장생(長生)의 선경(仙境)을 열어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衆生)을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이로부터 형렬(亨烈)의 집에 머무르사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실 때 형렬(亨烈)에게 신안(神眼)을 열어주어 신명(神明)의 회산(會散)과 청령(聽令)을 참관(參觀)케 하시니라” 라고 하였다. 김형렬은 또한 그 자신의 딸을 천지공사의 수부(首婦)로 내세우는 등, 증산은 김형렬을 특별히 신뢰하고 천지공사의 대부분에 참여하게 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증산의 화천 이후 김형렬의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정립의 증산교사에 소개되어 있는 것을 요약해 볼 수 있다. 김형렬은 처음에는 1913년에 고부인의 교단에 참여하여 그 활동에 협조하기도 하였으나 차경석의 처사에 뜻이 맞지 않아 1914년에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을 세우고자 하였다. 1915년에는 모악산 금강대에 올라가 백일 수련후에 신안(神眼)이 열려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하며, 이때부터 김형렬을 따르는 신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 당시 김형렬의 포교방법에 나타난 특이점은 입교자들에게 수련을 시키는 것 외에 각자 생년지지에 해당하는 동물의 그림을 그린 물형부(物形符)를 제작하여 각자 인장을 찍고 이것을 불사르게 하는 것이었다. 다소 주술적인 성향이 보이지만 이러한 의식행위를 통해 주력(呪力)을 얻고 조화권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행위는 또한 1916년에는 360명의 신도를 선발하여 각각 360군에 파견한 뒤 육무(六戊)를 쓴 물형부를 한날 한시에 전신주 밑에 묻게 함으로써 일본국에 큰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예언이 빗나가자 많은 신도들이 이탈하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18년부터는 위봉사(威鳳寺) 전주 포교당을 근거로 하여 교단 재건에 노력하였다고 한다. 1919년에는 금산사 미륵전에서 치성행사를 진행하다가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1921년에는 경성(京城)에 올라가서 새로운 교단재건을 위해 ‘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모았으며, 마침내 1922년에는 교단명을 ‘미륵불교’로 공표하고 그 본부를 금산사에 두게 된다. 1923년에는 또 일본정부 고급관리의 이름을 쓴 물형부를 제작하여 이전처럼 360군의 각 고을 신사(神社)와 전선주 밑에 묻고 일본 대재앙을 예언하였는데, 이것은 적중하여 포교운동이 활발해졌다고 한다. 1924년에 김형렬은 다시 영서(靈書)를 받았으며, 한 때 교단이 침체하기도 하였으나 보천교에서 탈퇴한 이상호의 입교와 탈교 속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1932년 김형렬 사망 후 교단은 해산되어 버렸다.
일제치하의 민족운동과 관련하여 김형렬 교단의 활동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관련교단에 해당하는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의 문헌에서 그 주요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법천사(大法天師)께서 유언하시되 대원사에 가서 박금곡 화상과 상의하야 삭발위승(削髮爲僧)하소, 불지양생(佛之養生)이니 불(佛)로써 깨치라 하심을 깨닫고 즉시 대원사에 가서 박금곡 화상, 곽법경 화상, 등 삼인(三人)이 결의하여 독립운동군자금을 보급키로 결정하되, 김형렬 화상이 모금대표자가 되어 서기 1917년엔 미륵신도대표 김형렬화상이 중심으로 약 6천여신도가 30본산(本山)의 사찰유지 분담금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은연한 가운데에 일대 모금운동을 일으키여 백성욱 화상을 통하여 극비리에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호국불교운동을 하다가 1919년 기미 음9월19일에 금산사 향로전에서 불공중 제등실(齊藤實) 총독 아래에 예속되었던 일본관헌 곧 전주경찰대가 급습하여 80여명 연행중에 28명이 전주형무소 제8호실 감방에 수감되어 6개월의 체형을 받고 형기가 끝난 뒤에도 곽법경 화상, 김형렬 화상, 박금곡 화상, 유제봉 화상, 황성열 화상, 정태환 서기장 사이에 호국불교사상은 굳어졌고 일부는 옥사하였다.
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김형렬은 그의 종교활동에서 호국적인 성향이 짙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특히 초기 교단활동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해 결의하고 노력하였던 사실들이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금산사 입구에 세워져있는 ‘태운김형렬선생등팔십팔애국지사충혼비(太雲金亨烈先生等八十八愛國志士忠魂碑)’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당시 김형렬을 대표로 하는 88인은 강증산의 생전의 명에 따라 생명을 바쳐 조국광복의 국권을 되찾을 것을 다짐한 뒤에, 기미독립운동 지하본부는 위봉사에 두고 군자금모금운동본부는 금산사로 정한 다음 백성욱 스님을 통해 1917년 상해임시정부로 3만여원을 1차로 송금하고 수차에 걸쳐 밀파했다고 한다. 또 1919년 9월 개최된 금산사 향로전의 행사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불공과 33본산 불사회의를 표방했으나 내용적으로는 군자금조달 전국대표자대회를 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경찰의 습격으로 88인의 애국지사가 수감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실토하지 않았고, 단지 단신교(壇信敎) 교도의 종교적 행사라고 말하였으며, 이 가운데 61명은 병사하거나 옥사하고 27명만이 살아나왔다고 전한다. 이 때의 기록은 번역집으로서 독립운동사자료집 제9집 임시정부사 자료 중 473쪽에서 477쪽, 1919년 12월 29일, 제36610호를 근거로 한다고 하였다.
이상을 통해 볼 때 김형렬의 종교운동에서는 비록 주술적인 성향이 강한 전교방법을 취하였으나 그 주된 행사의 취지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염원이 담겨있고 또 그 직접적인 활동도 추진하였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3. 조정산의 무극대도운동
강증산의 화천이후 증산교단은 대부분의 친자종도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것에 비해 직접 증산을 생전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교단을 창립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이다. 조정산은 조부 때부터 반일사상을 지니고 부친과 함께 배일(排日)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조정산은 일찍이 1909년(15세시)에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면서 촌락을 이루고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도력(道力)으로 구국(救國)제세(濟世)할 뜻을 정하고 입산공부를 하게 된 것이 종교활동의 시초가 되었다. 지속적인 공부 끝에 마침내 1917년 증산으로부터의 계시체험이 있게 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교단설립을 추진하였다. 망명 9년만에 귀국한 조정산은 지속적으로 강증산의 행적을 찾던 중 증산의 누이 선돌부인을 만나서 증산이 남긴 봉서를 전달받게 되니 이때가 1919년 정월달이다. 조정산은 정식 교단을 창설하기 이전에 그 준비과정에서 강증산의 유품을 찾고 체백을 모시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보천교 본소와의 마찰을 빚기도 하고 또 그 유품을 도난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1925년에는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을 건립하고 교명을 선포하게 되니 당시의 명칭이 바로 ‘무극대도(無極大道)’였다. 일제치하에서 신자수는 보천교와 쌍벽을 이룰 만큼 수십만에 달했다고도 한다. 1936년 이후 일제의 지속적인 종교단체 탄압에 의해 강제해산되기까지 조정산은 교단차원에서 민중의 자력갱생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후에 다시 종교활동을 전개한 조정산은 1950년에 교단명을 ‘태극도(太極道)’로 개칭하였으며, 1958년까지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태극도 외에 종단 대순진리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본래 조정산의 가계는 전통적으로 배일사상가 집안이었으므로 을사보호조약(1905)이후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부친, 삼촌등과 함께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산의 가족들은 만주 각지에 있는 동포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돕는데 그 비용을 전담하였고, 의지할 데 없는 동포들에게는 집과 식량을 주어 정착시키니 몇 년 동안에 수둔구 지역은 한인집단촌이 되었다고 한다. 1910년에 이르러 한일합방의 소식이 만주에 전해지자 정산의 가족들은 망배통곡을 사흘하고 항일투쟁의 뜻을 굳게 하였다. 그의 부친은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거출한 성금을 김혁, 이석대, 등을 통하여 독립군에 헌납하였으며, 그의 삼촌 조용의는 만주인으로 변장하고 각지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고 수차에 걸쳐 적정(敵情)을 염탐하여 독립군에 제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정산의 무극대도에서 주목되는 민중운동은 바로 경제적 자립을 위한 진업단(進業團)의 조직과 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봄에 조정산은 신도들 가운데 장정을 뽑아 진업단을 조직하게 하였는데, 헌금 2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3백석이 동원 투입되었다. 여기서는 수리(水利) 또는 황무지 개간과 간석지 간척 등 사업에 종사시켜 산업을 장려하고 도가의 생활안정과 빈민구제를 위함이었다. 1930년 봄에는 각처의 진업단을 불러 두 개의 단으로 나눈 다음 1개단 3백여명을 함경북도 무산으로 보내고 1개단 200여명은 북만주 모란강 근처의 삼림으로 보내어 벌채에 종사케 하여 많은 실적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진업단이 독립군과 합세할까 두려워 해체를 요청하기도 하고 벌채허가를 취소하기도 하는 등 방해하였다고 한다. 1932년에 조정산은 교단자금으로 금광 70여구를 출원하여 전주군 이서면 사금광과 충북 음성군 무극광산을 채굴하여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 그후 충남 안면도와 원산도의 두 곳 간석지 120여 정보 개간에 착수하여 1935년에 준공하기도 하였는데, 안면도 간석지는 일본인 마상(馬上)이란 사람이 무상으로 빼앗아가고, 원산도 간석지는 보령군청이 빼앗아갔다고 한다.
보천교와 함께 증산교단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는 과정에 1935년 12월 초에 전북지사가 무극대도교단을 방문하여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협조하여 줄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듬해 1936년 4월에 총독부로부터 증산계 각 교단에 대폭압령을 내리자 교단은 표면적 활동을 중지하고 비밀결사로 전환하였으며, 1941년까지 이어오다가 2차대전 시기에 이르러 활동을 중지하였다. 이듬해 무극도 도장은 경매처분 당했다.
하지만 조정산은 일제의 폭압을 피해 은거하면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와 종교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니 신도들 또한 꾸준히 정산이 거처하던 회룡재를 찾아서 모여들었다. 이 때 조정산은 1945년 음력 7월에 이르러 신도들에게 ‘태극’의 진리를 설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회룡재 뒷 뜰에 세운 후에 임원들에게는 또한 이 태극기를 동구 밖에 세우게 하였다. 당시는 아직 해방 전이라서 모든 임원들이 시국을 생각하여 불안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로부터 5일째 되는 날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일제하 조정산의 종교활동에 나타난 민중ㆍ민족운동의 특성을 살펴볼 때 대체로 신도들의 경제적 자립에 역점을 둔 것이 두드러지며, 민족운동에 있어서는 교단차원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일본에 저항하는 정신과 민족독립을 향한 염원은 교단조직과 상관없이 꾸준히 지속되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이라 하겠다.
4. 정수산의 미륵불교운동
정수산(鄭秀山, 본명은 鄭寅杓, 1897~1955) 또한 강증산의 친자종도가 아니면서 하나의 교파를 세워 일제하 종교운동을 하였던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정수산은 나이가 듦에 따라 조국이 일제의 발굽아래 짓밟혀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온 겨레가 신음 속에서 고통을 받는 괴로움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중생을 건질 수 있을까 하는데 골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수산은 대성인의 도덕으로 중생을 제도할 뜻을 정하고 스스로 성현의 길을 닦아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으며, 또한 1922년(26세)에 이르러 ‘미륵부처님’의 출세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수도의 길에 정진하면서 1933년경에 신병(身病)으로 고통받을 때 선관(仙官)을 만나는 등 여러 차례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정수산은 1934년 1월 10일에 결정적인 계시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수도하던 미륵당에서 아침에 황홀한 삼매경에서 천신(天神)의 음성과 그 가르침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득도(得道)로 하여 교단을 창설하게 되니 교명이 미륵불교였다. 이 때 미륵불교의 신앙대상은 구천미륵불(九天彌勒佛)로서 증산대성(甑山大聖)이요, 증산이 행한 천지공사가 미륵불교 교리의 핵심사상이며, 교화내용으로서 유ㆍ불ㆍ선(儒佛仙)의 합일이나 해원(解冤) 보은(報恩) 상생(相生) 등의 법리는 모두 증산의 교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에 정수산은 자신이 아미타불임을 밝히고 ‘미륵부처님이 아미타불을 낳아서 아미타불이 이 세계를 평화롭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수산의 종교활동은 해방이후 1955년까지 지속되다가 타계한 후에 수대(數代)의 대표로 현대까지 이어졌다.
일제하 정수산의 종교활동에서 드러난 주요한 민족운동을 살펴보면 일본패망을 기원하는 신도행사(神道行事)가 있다. 1938년 4월 8일에 정수산은 모악산 금산사에서 신도 50여명과 함께 김형렬의 영신(靈神)을 미륵불 앞에 봉안하는 식을 올렸다. 같은 해 7월 15일에는 신도행사를 하면서 명치(明治)신명(神明)을 불러 조선을 위하여 일을 하게 하고 탁주 한 잔을 주어 보냈다. 여기 신도행사에서 정공일(鄭公一)이라는 사람은 명치신명에게 “만사무석(萬死無惜)한 놈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 조선에 오기를 원하느냐”고 꾸짖으니, 명치신명의 대답 가운데 “내가 미륵세존의 명을 받아 조선일로 불려왔는데 조선 사람은 이러한 깊은 이면을 모르고 증오와 계시가 심하여 나는 떠날 터이니 술이나 한 잔 주시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수산은 또 신도행사에서 조선에 살릴 생(生)자, 일본에는 죽을 사(死)자를 붙이고, 일본의 소화에게 떨어질 낙(落)자를 붙여 일본이 패망하도록 하는 일을 한 후, 참석한 교도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천명을 순종하고 성경신(誠敬信)을 다하여 선불유(仙佛儒)를 분명(分明)정행(正行)하여야 한다. 천지는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화(禍)를 준다. 일본(日本)사(死)롸 소화(昭和)락(落)을 좋아하지 말고 선심(善心)선덕(善德)을 실행하라. 천지는 선한 자에게 후하고 악한 자에게는 박하다”라고 설한 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지성껏 기도하라고 하였다.
한편 정수산의 이와 같은 신도행사를 감시하던 교도 중의 한 사람이 일본경찰의 앞잡이로서 김제경찰서에 밀고하여 1940년 12월 15일 정수산을 비롯하여 교도 42명이 수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 정수산은 교도들에게 “취조를 당할 때 조금도 변명하지 말고 사실을 숨기지 말라. 우리 일은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조국의 광복과 우리 교의 발전을 기원해오다가 불행히 이 화액을 당하였으니 만일 사실을 숨기고 부인하며 숨기면 천지신명들에게 위약(違約)하는 것이다.”하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4개월간에 걸친 취조 끝에 1941년 12월 전주지방법원으로 넘겨졌는데, 정수산 또한 당시에 취조를 받으면서 일체의 변명없이 당당하게 말함으로써 취조하던 검사가 감복하여 정상을 참작하겠다고 했던 것으로 전한다. 마침내 1943년 9월 공판에서 정수산은 징역 8년에 처해지고 대부분의 교도들도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으니 광복이 되면서 비로소 출옥하였던 것이다.
5. 이상호의 동화교운동
이상호(李祥昊, 호는 靑陰, 1888~1966)는 오늘날 증산교단의 경전자료에 있어서 최초의 경전문헌인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1926)와 대순전경(大巡典經, 1929 초판)을 간행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본래 젊어서 북경 상해 등지에서 외유하다가 귀국하여 1915년(27세) 당시 태을교로 불리어지던 교단에 입교하였다. 그의 동생 이정립(李正立, 호는 南舟, 1895~1968) 또한 1919년 당시 보천교에 입교하여 포교활동에 종사하였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두 형제는 1919년에 보천교에서 천제를 지내고 60방주를 조직할 때 각각 주요 방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상호는 1922년 보천교에서 일제의 외압에 의해 교단공개를 할 때 차경석으로부터 그 전권을 위임받아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보천교의 종지를 정하고 모든 공개조직을 구축하는 등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1924년 시대일보사 사건으로 물의가 일어나자 교직을 박탈당한 뒤 보천교혁신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교단의 친일정당화하는 분위기에서 조직을 해산하고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에 이상호는 교경편찬에 의욕을 가지고 김형렬 외 김경학, 박공우, 안내성, 김송환, 유찬명, 김덕찬, 김준찬, 이치복, 김자현, 문공신, 최덕겸 등 모든 친자 종도들을 방문 답사하면서 재료수집을 하고 교경편찬에 주력하였다. 1928년에 이상호는 독자적인 새로운 교단을 구성하고 교명을 선포하니 곧 ‘동화교(東華敎)’이다. 1931년에는 조종골에 있던 고부인이 옮겨옴에 따라 두 교단의 연합교단이 발족되기도 하였다. 1943년에 동아흥산사 사건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다가 해방이후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 이상호는 종교활동을 재개하여 1945년에 ‘대법사(大法社)’라는 교화단체를 조직하여 운영하였으며, 1949년에는 증산교단통정원(甑山敎團統整院)을 조직하기도 하였고, 1955년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 1961년 종교연합체 동도교(東道敎) 증산교회(甑山敎會)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동아흥산사(東亞興産社) 사건은 이상호의 종교활동에 나타난 대표적인 민중ㆍ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1942년 11월에 임경호 문정삼 이남주 등이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증산천사님의 공사내용으로 생각하면 전쟁은 3년밖에 남지 않았고 이 전쟁끝에 일본이 패망하여 물러갈 때에 우리나라는 모든 질서가 무너져서 큰 혼란에 빠지게 될 터인데 우리가 그 때의 혼란을 방지할 대책을 연구하여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는데 서로 동의하면서, 그 혼란방지의 대책으로 증산계 각파 신도들을 규합하고 또 수운계 각파 교단과 연결하여 큰 신앙적 지도세력을 결성하여 전 국민의 사상을 통일하며 건전한 정치세력의 출현을 뒷받침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증산교단은 총독부로부터 집회가 금지되고 있는 실정이었으므로, 임경호는 경성 총독부에 올라가 경무국 보안과장을 만나서 ‘사상위기설(思想危機說)’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민간 자발적 신앙지도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1943년에 마침내 ‘동아흥산사’라는 기업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경무국의 묵인 하에 본격적인 사원모집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8월말까지 사원 1만 4천명이 모집되고 구금(口金) 7만여원이 수합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염탐하던 지역 경찰서에서는 그것을 음모로 규정하고 경성 경무국의 동의를 얻어 핵심인물들을 체포하게 되니 이 때 구속된 사람이 이상호를 포함하여 총 24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 사건은 지방경찰서에서 ‘종교통일에 의한 조선독립 음모단체사건’으로 건명(件名)을 붙여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취조하였다고 하니 증산교계의 종교활동에서 기록될 만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6. 여타 증산교단의 민족운동과 일제하의 수난
일제하에서 다양하게 창립된 증산교단은 일제의 치밀한 방해공작과 탄압으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었다. 앞 절에서 언급한 증산교단은 대체로 잘 알려져 있는 교단이면서 그 민중 민족적인 활동에서 뚜렷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군소 교단들이 활동하였지만 자료의 한계로 더 자세히 밝히기는 어려우며, 다만 여타 교단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범증산교사와 증산교사에 간헐적으로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간략히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허욱(許昱, 호는 南松, 1887~1939)은 전남 보성 사람으로서 1914년(28세시)에 그 마을에 전도하러 온 종도 이치복과 김형국을 만나서 도를 전해받았다. 허욱은 열심히 수련하여 고유한 신비체험들을 하게 되었으며, 특히 유불선 삼도(三道)의 이치를 통했다고 한다. 1928년에 자신의 교명을 삼덕교(三德敎)로 선포하고, 신앙대상을 증산상제로, 교리는 생화도덕(生化道德)이라 하여 요령을 밝혔다. 1936년 조선총독부의 증산교단 폭압령이 내려지고, 1937년 9월 10일에 허욱은 자신의 집에서 교도들에게 말하기를, “일찌기 증산대성사께서 대란(大亂)을 일으키기 위하여 서양으로 보내셨던 신명들이 이번 전쟁으로 사명을 마치고 생화수기(生化數氣)를 따라서 멀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리 민족으로서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라. 이때를 당하여 우리가 남경 자금산에 가서 돌아오시는 신명들을 영접하는 의미인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인왕산 밑 사직단(社稷壇)에 신명봉안제를 지내야 하리니 그 방법을 연구하여 보라”고 하였다. 이 일을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출정군인 위문단으로 위장하고 신명봉안제를 지내기로 추진하였는데 중도에 적발되어 신도 80여명이 체포구금되었다. 이 일로 삼덕교 교도들에 대한 대대적 체포령이 내려짐에 따라 1938년 7월부터 허욱을 비롯한 교도 수백명이 구금되었다. 허욱은 1938년 9월에 전남 경찰부에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집에 와서 그 다음해에 순교하였다.
채경대(蔡慶大, 호는 龜岳, 1890~1940)는 전남 무안 사람으로서 본래 1914년(25세시)에 보천교에 맏형과 같이 입교하였다. 한때 1919년 60방주제를 시행할 때 두 형제는 각각 주요 방주의 자리를 맡음으로서 보천교의 최고 교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 채경대는 보천교에서 탈퇴하여 전북 태인에 살면서 객망리 성전을 짓는 일을 하였으며, 1930년에 새로운 교단으로서 삼성교(三聖敎)를 창립하였다. 1931년에 오랜 수련 끝에 대각을 이루고 포교에 주력함으로써 많은 신도들이 모였다. 채경대의 삼성교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1936년 이후 신도들의 만주이주운동이다. 조선 내에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채경대는 1936년 모든 신도들을 만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으며, 농장을 경영하고 교인촌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도에 채경대는 간부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되어 2년만에 출옥되기도 하였으나, 이주운동을 계속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몇 개의 농장을 개설하였다. 그가 새로운 정착지로 정한 곳은 만주와 몽고의 국경지대인 봉천성 강평현 박인촌에 있는 요양와보(遼陽窩保)라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농장을 개간케하고 교인 수십호를 이주시켜 신농농장이라는 간판을 걸고 교본사를 이곳에 정하였다. 그는 이곳에 머무르며 요양와보 이외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교인들을 통화성 유하현 고산자촌에서 100여리를 들어가 대전자촌 부근의 황무지개간에 참여시켜 최후의 교인촌을 건설케하였다. 채경대의 종교활동은 이렇게 만주에 교인촌을 건설하고 많은 고난 속에서 신앙활동을 병행함으로써 한민족의 자립운동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강증산의 친자종도였던 문공신(文公信, 호는 瀛祥,1879~1954)은 정읍 김제 고창 부안 등지에서 포교하면서 “이번 전쟁에 일본이 패망하고 장개석 군(軍)이 입국하게 될 터이니 우리는 크게 비밀단체를 모았다가 장개석 군을 환송하여야 한다”는 말을 유포하다가 탄로되어 1941년 3월에 20여명이 함께 김제경찰서에 체포되어 ‘국제간첩혐의’로 전주검사국에 송치되어 7년 징역에 처하였다가 6명은 옥사하고 남은 사람은 을유해방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역시 친자종도였던 박공우(朴公又, 호는 仁菴, ~1940)는 1914년부터 정읍군 흥덕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신도의 수가 많을 때는 2백여명이었다고 한다. 1916년에는 교본부를 태인으로 옮겼다가 1928년에는 원평으로 옮겼다. 그의 신도 가운데 홍순문 홍순옥 박인택 박인석 네 사람은 수련석에서 결의하고, 원 동화교(東華敎) 간부들을 포섭하여 부안 변산에서 ‘봉래결의(逢萊結義)’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였으며, 수련을 계속하는 한편, 부안군 산내면 지지포에 본거를 두고 “을유년 칠월이면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되리라”는 예언을 유포하면서 비밀포교를 강행하였다. 1942년 4월에 전주경찰서 형사대 수 십 명이 지지포에 출동하여 신도 70여명을 체포하여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전주검사국에 송치하여 예심에 회부하였는데 전주 형무소에서 열 세 사람이 옥사하고 남은 사람은 을유해방을 맞이하여 출옥되었다.
Ⅳ.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에 나타난 종교적 성격
본 장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증산교단들의 다양한 민중ㆍ민족운동에 대하여 종합적인 측면에서 그 종교적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물론 모든 증산교단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여타 민족종교의 활동과 구별될만한 점에서 특징을 언급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여기서는 계시와 제의에 의한 활동, 비폭력주의적 운동 그리고 광제창생의 이념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서술해보기로 하겠다.
1. 계시(啓示)와 제의(祭儀)에 의한 활동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에서 엿볼 수 있는 종교적 성격은 대체로 교주들의 독자적인 교단창립과 그 카리스마적 체계구축을 위한 계시체험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이다. 본래 증산교단의 신앙대상이 되었던 강증산의 생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증산이 보여주었던 신인(神人)으로서의 면모는 그가 화천한 이후에도 종도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고 또 언제나 현존하는 신(神)으로서의 위상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최초의 증산교단은 고수부의 강력한 신내림 현상으로 출발하였으며, 모든 종도들은 현존하는 증산의 모습을 그리며 의욕적인 종교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차경석의 교권장악을 위한 교단운영으로 인해 많은 종도들이 뿔뿔이 흩어져 분열된 모습을 보였지만, 저마다 독자적인 교단을 창립할 때는 모두 증산으로부터의 계시와 신비체험을 중요시여기게 되었다. 여기에 한 몫을 담당한 것이 바로 태을주(太乙呪)를 이용한 주문수련이었다고 본다. 태을주는 증산이 생전에 종도들에게 “오는잠 적게 자고 태을주(太乙呪)를 많이 읽으라 하늘 으뜸가는 임금이니 오만년(五萬年)동안 동리동리(洞里洞里) 각(各) 학교(學校)에서 외우리라”고 하여 가장 중요한 수련법으로 전해온 것이다. 모든 종도들은 증산 화천이후 교단 창립을 할 때 이러한 수련을 통해 저마다의 신력(神力)을 얻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계시체험과 더불어 교단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할 때면 대체로 신명(神明)과의 교제를 위주로 하는 제의(祭儀)행사가 수반되었다. 제의를 통한 의례행사는 교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지만 신도들에게는 교단활동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차경석의 보천교운동에서 살펴보면 최초 고수부의 계시체험과 신비한 능력들은 마치 증산의 재림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으며, 차경석은 고수부의 신력을 빌미로 하여 교도들을 규합하였다. 이후 교단운영과정에서 조직을 새로 구축하고 확산할 때는 반드시 천제(天祭)를 지내어 교주의 권위를 드러내었으며, 황석산에서 개최하였던 천제는 새로운 황제출현과 국가건설을 위한 의미로 비춰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형렬 또한 교단을 창립할 때 모악산에서의 수련으로 신안(神眼)이 열렸다고 하며, 특별히 물형부(物形符)을 묻는 제의를 통해 민족적인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조정산은 친자종도가 아니지만 이미 중국 만주 땅에서 증산으로부터의 계시체험을 했으며, 귀국 후의 종교활동에서도 지속적인 제의행사를 통해 화천한 증산과의 교감을 나누고 민중 민족운동의 저력으로 삼았다. 정수산 또한 계시체험을 통해 교단을 창립하였고, 김형렬의 영신을 미륵불에 봉안하는 신도행사는 그의 종교활동에 드러난 제의적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사건으로 기록된다.
계시체험과 제의를 중요시하였던 증산교단에서 일제 후기 민족운동에 나타난 공통적 특징은 하나의 예언적인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즉 이상호의 동아흥산사 사건은 일제의 패망이 이미 증산법설에서 예언되었다고 보고 해방 이후의 국내 혼란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전개된 민중ㆍ민족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허욱이나 문공신, 박공우 교단 등에서도 이와 같은 예언을 신봉하여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의 주요한 종교적 특징으로서 살펴본 계시와 제의 활동은 여타 민족종교의 운동과도 차별될 수 있는 부분으로 여겨진다. 주로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등에서 주도한 사회계몽운동, 신교육운동 및 경전, 잡지출판활동, 경제활동의 측면에서 비교해 볼 때도 이러한 성격은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원형적인 특성이 이후의 종교사 전반에 걸쳐서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증산교단의 원형은 무엇보다도 강증산이 지녔던 신격(神格)에 대한 종교체험이 후대에 전승된 형태를 보이고 있으므로 어떤 인격적인 실재에 대한 관념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계시체험과 제의적인 활동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특징이 드러났다고 하겠다.
2. 비폭력주의적 운동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은 또한 당시의 일제치하에서 비교적 온건한 활동을 위주로 하고, 어떤 폭력적인 조직이나 유혈투쟁을 통해 민족종교의 특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있다. 일제치하에서의 민족종교는 기성의 종교와는 달리 순수한 종교라기보다는 민중의 결집과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요주의 단체로 규정되어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라는 이름으로 규정하여 탄압받았다. 이것은 1919년 3ㆍ1 독립운동을 정점으로 하여 총독부 규정으로 공식화하였던 사례가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대부분의 민족종교는 일본의 감시하에 민족독립의 의지를 강화해나갔으며, 그 구체적인 활동도 보다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수행하였다. 천도교의 경우 민중을 계몽하는 신교육운동은 물론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나갔다. 이미 3ㆍ1운동을 주도한 대부분의 인사가 천도교인이었던 것처럼, 1926년 6ㆍ10만세운동에는 천도교 민족운동 세력과 학생운동 세력 및 조선공산당의 일부세력이 동참하여 범 민족적 운동으로 승화하려던 대표적 항일운동이었다. 이후 1929년 비밀결사 항일단체로서의 오심당(吾心黨) 활동도 대표적인 대중운동의 일환이었다. 한편 대종교(大倧敎)에서는 일제의 강력한 금지에 봉착하여 1914년에는 이미 만주로 본부를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시영(李始榮)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의 중추세력을 이루고,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설립하고, 이듬해 1920년 빛나는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거두는데 중심세력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증산교단의 경우에는 여타 민족종교에 비해 대단히 온건하고 비폭력적이었으며 이것은 교리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강증산의 사상에 따르면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 신명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자를 너희들에게 붙여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하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고 한 것은 이미 한일합방이 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해 예정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36년간의 일본 식민지통치는 곧 일본이 조선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것일 뿐 일을 마치면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해방도 예정되어 있다. 이처럼 증산교단에서는 강력한 항일투쟁보다는 예정된 기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신앙적 자세가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그 대응태도도 소극적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계시와 제의적 특징도 그러한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물론 하나의 교리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양면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증산의 교리나 사상도 어떤 측면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민족운동을 촉발할 가능성도 또한 그것을 억제할 가능성도 함께 갖고 있다. 하지만 초기 증산교단의 현실사회변혁을 위한 투신은 처음부터 억제하고 있었다고 본다. 천지도수를 설명하는 증산의 강한 예정론적 설명과 그의 후천선경에 대한 약속은 참여자들의 신앙을 주술화 내지 기복화시키는 동시에 현세변혁을 위한 투신을 저지함으로써 이 종교운동의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이나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그 응집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보천교와 무극대도에서 추진하였던 전통문화보존운동과 경제적 자립운동, 동화교의 교단연합운동, 미륵불교나 인도교, 박공우 교단 등에서 엿볼 수 있는 민족운동은 오히려 순수종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측면이 많다고 할 수 있으며,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강조되면서 비폭력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물론 보천교나 김형렬 미륵불교의 경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지원하였다는 기록을 놓고 보면 항일투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교단차원에서 직접적인 유혈투쟁을 전개한 것은 아니므로 이와 같은 비폭력주의는 증산교단의 대체적인 특징으로 규정하여도 무방하리라 본다.
3. 광제창생의 이념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에 대해서 또 하나의 종교적 특징을 찾는다면 바로 ‘광구천하(廣救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위한 우주적 이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운동 자체가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부터 출발하지만 일제치하의 민족종교는 ‘한민족’의 현실적인 구원에 보다 무게중심이 실려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미 민족종교라는 용어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한민족의 단일운명공동체 의식이 포함된 종교로서 혈연, 지연, 역사, 운명 등에서 동일한 심정적 개념을 내포’함으로써 한국민족 중심의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천도교의 사회계몽운동, 대종교의 민족경전발간 및 독립운동 등은 그 교리적인 해석방향을 한민족의 현실적인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증산교단의 교리는 물론 민족적인 성격도 내포되어있지만 궁극적인 가치는 ‘후천선경(後天仙境)’이라고 하는 세계적 차원의 이상을 지향함으로써 당시의 현실을 보다 우주적인 세계관으로 전향하는 성격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증산의 ‘천지공사’에 나타난 교리적인 특징에서도 잘 드러났다고 본다.
강증산은 설법하기를 “내가 보는 일이 한 나라의 일에만 그치면 쉬울 것이로되 천하의 일이므로 시일이 많이 경과하노라.”고 하였으며, 한 때 의병의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을 때 “경무관이 「네가 의병이냐」는 물음에 「나는 의병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 라고 하고, 「사람마다 도략(韜略)이 부족하므로 천하를 도모치 못하노니 만일 웅재대략이 있으면 어찌 가만히 있으랴.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하노라」”고 대답한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종교운동이 세계적 차원에서 광구천하의 일환이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증산교단의 민족운동의 성격은 철저하게 ‘광제창생’의 이념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고 본다. 일제하 증산교단의 활동이 여타 민족종교에 비해 항일운동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지적을 감안할 때, 그 이념적 요인을 굳이 찾는다면 한민족의 현실에 머물지않고 세계정세의 변화를 읽어서 후천선경의 도래가 이루어짐으로써 진정한 민족구원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고 변론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한국 근대 증산교단의 민중ㆍ민족운동에 대해서 개괄해보았다. 오늘날 한국 신종교 실태에 있어서 증산계 교단은 여타 민족종교에 비해 단일 계열로서 가장 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하나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국 근대에 출현한 대종교가로서의 강증산에 대하여 그만큼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증산이 행한 신이(神異)한 행적이 다만 개인의 특별한 능력에 머무르지 않고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하는 위대한 역사를 선언하고 추진하였다는 점에서도 종교적 진리의 폭은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이와 함께 교단을 창립한 사람들의 종교적 체험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궁극적 실재의 인격성에 경도된 신비적인 특성을 보임으로써 많은 교단이 창설될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그만큼 증산교단의 신앙활동은 강증산의 신격이 강조되고 이에 대한 자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의 근대는 외우내환의 격동기와 민족적인 수난을 겪는 과정에서 종교활동도 다분히 민족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데, 여기에 외래종교보다는 민중이 중심이 된 자발적인 민족종교가 이러한 사회변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자 노력하였다. 증산교단의 활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증산의 교리가 중심이 되어 민족구원과 갱생을 위하여 했던 노력은 특별히 다른 민족종교와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고 본다. 다만 그 특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비주의적인 색채와 비폭력주의적 운동 등에서 나타난 모습은 다른 민족종교 교단에 비해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변동에 따른 종교적 대응은 그 종교에 대한 현상적인 이해로부터 가능하다고 보아 이 시대 종교운동의 주요한 축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산교단의 활동은 정보통신문명이 지배하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 참고문헌 】
1. 경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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