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 한국 신종교의 주요한 종교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증산을 신앙하는 여러 종교 단체에서는 각각 그를 신앙대상화하며 그 가르침을 봉행하고 있으며, 종교학계를 중심으로 한 학계에서도 그동안 증산의 사상ㆍ종교 활동ㆍ교리 등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곧 한국 사회에서 증산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대략 신앙인들이 바라보는 증산과 학계에서 연구한 증산으로 양분할 수 있겠다.
증산이 1909년 별세한 후 증산의 직계 종도(從徒)들과, 종도는 아니지만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거나 종교적 영감을 얻은 여러 인물들이 각각 증산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朝鮮の類似宗敎에서는 총 11개의 단체가 훔치계(증산계) 종교 단체에 해당한다고 하였고, 1970년 간행된 한국 신흥 및 유사종교 실태조사보고서에는 10개 단체가 조사되었으며, 1971년 발행된 증산종단개론에는 33개 교단이, 1985년 한국 신종교 실태조사보고서에는 전체 신종교 155개 단체 중 가장 많은 단체인 총 47개 단체가 증산계 신종교로 조사되었다. 1993년 한국종교연감에서는 증산계 교단을 최대 70여개로 보았으며 민족종교 종단의 교조 사후 분파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증산의 별세 후 다수의 창교주(創敎主)들은 증산이 남긴 새롭고 독창적인 종교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를 교조(敎祖)로 한 종교 조직을 구성하고 증산에 대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증산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한국종교사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의 전개 및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증산 신앙운동에 대한 고찰이 제외되면 한국종교사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고 볼 수 없다.
학계에서의 증산 신앙운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할 수 있다. 하나는 한민족의 뿌리를 중심으로 하고 주체적인 이미지를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신종교와 더불어 ‘민족종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한국 민중에 의해 일어난 개혁적ㆍ혁신적 종교운동으로서의 ‘민중종교’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해원상생으로 표방되는 증산의 교설이 일제강점기 국권을 피탈당한 조선 민중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구원의 희망을 제시한 민족주의적 측면과 민중 해방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말이다. 곧 증산은 외세의 침략에 따른 민족적 고통의 시대에 상실감과 암울함에 빠져 있는 우리 민족에게 종교적 희망의 논리를 제시하고 더 나아가 창생을 살리고 천하를 구하려는 이상을 품은 선각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증산의 교설과 사상이 역사에 펼쳐진 현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증산의 직계 종도인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1880~1936)에 의해 전개된 보천교이다. 일제강점기 차경석(車京石)은 증산의 서거 이후 포교운동을 전개하여 교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대 당시 그 교세가 천도교를 능가하기도 하였다. 3ㆍ1운동의 실패 이후 민족 해방의 염원이 좌절된 민중은 속속 보천교에 입교하여 조직을 구성하고 성금을 모으면서 보천교는 막강한 자금력과 신도를 보유한 조선의 거대 종단이 되었다. 그러나 보천교는 교단 자체의 신구파의 내홍, 일제의 탄압, 언론의 비난, 친일 논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 등의 원인으로 교세가 급락하였고 교주인 차경석마저 사망하면서 거의 사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보천교는 일제로부터 반체제적인 사교 집단, 민족운동진영으로부터는 전근대적이고 반민족적인 미신 단체로 매도되면서 근래까지 부정적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게 되었고 역사학계로부터도 외면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보천교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여러 자료가 학계에 인지되고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서 차경석과 보천교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보천교 다음으로 큰 증산계 교단이었던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1958)의 무극도(无極道)에 대해서도 관련 학술발표와 연구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학술연구를 바탕으로 증산을 신앙인들의 종교적 신앙의 대상, 민족적 고난과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인류 구원의 이상을 펼친 종교가라고 보는 그동안의 관심의 외연이 역사학계에까지 넓어지고 있다. 이러한 관심의 확장선상에서 2018년에는 증산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고 정읍에 위치한 그의 생가터 및 주변을 정비하며 역사문화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하는 취지의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발표된 연구논문에서 특히 증산 생가터에 대한 정비의 필요성, 의의, 기대효과, 추진 계획에 대한 내용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앞에서 서술한 한국의 주요한 종교 인물이자 사상가인 증산의 생가터의 정비와 관련하여 생가터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고 그 종교문화적 의의와 가치를 고찰하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2장에서는 증산 생가터의 위치를 고증하여 추론하고자 한다. 증산 생가터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는 것과 관련하여, 종단 대순진리회 교무부와 대순종교문화연구소는 다년간 인근 지역 주민의 인터뷰 녹취 자료를 생산ㆍ수집하고 관련 자료를 축적하여 왔으며 신월리 436번지를 증산 강세지로 인식하였다. 특히 인터뷰 자료는 전적으로 교무부에게 제공받은 것이며, 대순종교문화연구소로부터는 토지 대장 자료 등을 공유 받았고 논문의 향상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필자는 그러한 연구의 초석 위에 다른 생가터 후보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몇 가지 자료를 부가하여 해당 번지가 증산 생가터임을 논증하겠다. 3장에서는 이러한 생가터가 지닐 수 있는 종교문화적 의의를 살피고 그 가치를 규명하여 생가터의 정비와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할 것이다.
Ⅱ. 생가터 위치 고증
1. 증산 생가터 후보지
증산 생가터의 명확하고 실증적인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증산 종단의 경전, 종교연구 서적, 일제 공문서에 기재된 증산 탄강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 도표는 제 문헌의 제목ㆍ저자ㆍ발행 연도 및 증산 생가 주소에 대한 사항을 정리한 것으로 증산의 외가인 서산리(西山里)로 기재한 5권의 문헌, 덕천면 신월리라고 하면서 주소를 명시한 3가지 문헌, 번지 없이 덕천면 신월리라 기록한 28권의 문헌을 각각 연도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표 1> 증산 생가터 후보지
| 경전 및 연구서적 | 저자 및 발행처 | 발행 연도 | 증산 생가 주소 | 강세지 | |
|---|---|---|---|---|---|
| 1 | 洋村及外人事情一覽 | 平安南道 | 1924 | 全羅北道 井邑郡(元 古阜郡) 德川面 西山里 | 증산의 외가서산리 |
| 2 | 증산천사공사기 | 이상호 | 1926 | 全羅北道 古阜郡 西山里 <p.1.> | |
| 3 | 보천교지 | 보천교 중앙총정원 | 1964 | 全羅道 古阜郡 沓內面 西山里(지금 井邑郡 梨坪面 斗地里) <p.2.> | |
| 4 | 용화전경 | 김낙원 | 1972 | 全北 井邑郡 梨坪面 斗地里(당시 古阜郡 沓內面 西山里) <pp.22-23.> | |
| 5 | 보화교와 신앙체계 | 보화교본부 | ? | 全羅道 古阜郡 沓內面 西山里 <p.12.> | |
| 1 | 증산종단화보 | 박종설 | 1974 | 全北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새터 540-2 <pp.12-13.> | 신월리 540-2 |
| 2 | 무오동지 치성심고문 | 강석환 | 1978 | 全北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435-1 <pp.17-18.> | 신월리 435-1 |
| 3 | 한국신흥종교총감 | 이강오 | 1993 |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객망동) 540-4 <p.186.> | 신월리 540-4 |
| 1 | 普天敎一般 | 全羅北道 | 1926 | 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 신월리신월리 |
| 2 | 대순전경 초판 | 이상호 | 1929 | 朝鮮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3 | 교조약사 | 이영호 | 1935 | 全北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今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pp.2-3.> | |
| 4 | 朝鮮の 類似宗敎 | 무라야마 지쥰 | 1936 | 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 |
| 5 | 화은당실기 | 대한 증산 | 1960 | 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p.1.> | |
| 6 | 대순전경 6판 | 이상호 | 1965 | 朝鮮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新基 <p.1.> | |
| 7 | 선도진경 1판 | 태극도 문화부 | 1965 | 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基里 <p.1.> | |
| 8 | 선도진경 2판 | 태극도 편찬위원회 | 1967 | 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基里 <p.4.> | |
| 9 | 증산대도전경 | 김삼일 | 1970 | 全北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손바래기 <p.4.> | |
| 10 | 증산종단개론 | 증산종단연합회 | 1971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11 | 전경 | 대순진리회 교무부 | 1974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pp.2-3.> | |
| 12 | 증산교사 | 이정립 | 1977 | 朝鮮國 古阜郡 優德面 손바래기(客望里) <pp.2-3.> | |
| 13 | 선도진경 3판 | 태극도 편찬위원회 | 1983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p.1.> | |
| 14 | 도훈 | 보천교 | 1986 | 全北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15 | 증산상제 통일진법 대성경집 | 이효진 | 1987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新基) <p.64> | |
| 16 | 진경전서 | 태극도 | 1987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17 | 천지개벽경 | 정영규 | 1987 | 朝鮮國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p.10.> | |
| 18 | 순천도사 | 김시목 | 1988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19 | 진경 | 태극도 편찬위원회 | 1989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20 | 천지공사실록 동곡비서 | 김찬문ㆍ김태진 | 1990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pp.22-23.> | |
| 21 | 증산도 도전 |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 1996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22 | 천지개벽경연구 | 이중성 | 1996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pp.23-24.> | |
| 23 | 증산법종교 육십년사 | 증산법종교 | 1997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24 | 한국신흥종교 | 김홍철ㆍ류병덕ㆍ양은용 | 1997 | 全羅道 古阜郡 손바래기(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p.151> | |
| 25 | 대보경 | 오성산도장 | 1999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新基) <p.29> | |
| 26 | 교리문답 | 증산법종교 | 2001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p.15> | |
| 27 | 증산교사상연구 | 김홍철 | 2003 | 全羅北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
| 28 | 미륵경전 | 박판수 | 2005 |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
몇몇 문헌에서는 증산이 탄강한 곳을 증산의 외가인 이평면 서산리라고 하였다. 이상호의 증산천사공사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父親의 諱는 興周요 母親은 權氏라 權氏가 庚午 九月 어느 날 밤에 한 을 어덧스니 하눌이 南北으로 갈나지며 큰 붉은 덩어리가 낫하나서 졈졈 나직하야 몸을 덥흠애 그 빗이 天下에 비나더라. 이로부터 잉태되야 十三朔을 지나 辛未九月十九日子時에 全羅北道 古阜郡(今井邑郡에 倂合되다) 西山里에서 天師가 誕降하시다.
즉 모친인 권양덕이 1870년 음력 9월에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는 꿈을 꾼 뒤 아기를 잉태하여 13개월이 지난 1871년 음력 9월 서산리에서 출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호는 1929년 편찬한 대순전경에는 이와는 다르게 기록하였다.
先生의 姓은 姜이오 名은 一淳이오, 甑山은 그 號이시니 距今 五十八年前 李朝 高宗 辛未 九月十九日에 朝鮮 全羅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今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에서 誕降하시니라. 父의 名은 興周오 母는 權氏니 權氏가 古阜郡 馬項面 西山里 그의 親家에 覲省하엿다가 하로는 하눌이 南北으로 갈나지며 큰 불덩이가 나려와 몸을 덥흠에 天下가 光明하여진 을 고 일로부터 有身하엿더니 그 誕降하실 에 産室에 異香이 가득하며 밝은 빗이 집을 둘너 하눌에 쳣더라.
위 문헌기록에서는, 모친 권씨가 서산리에 근친하러 갔을 때 태몽을 꾸고 태기가 있더니 13개월이 지나 덕천면 신월리에서 증산이 탄강하였다고 하였다. 즉 서산리는 증산의 모친이 태몽을 꾼 장소이며 증산의 탄강지는 신월리라는 것이다. 이상호는 1926년 증산천사공사기에서 작성한 내용이 오류라는 것을 인지하고 위와 같이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문헌에서도 신월리라고 기재되어 있는 점에서 서산리는 증산의 탄생지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증산의 생가지가 신월리라고 한다면 문제점은 정확히 현 신월리 어느 지번이냐는 것이다. 위 문헌에서 제시한 지번과 현재 증산의 탄강지로 알려진 지번 등을 후보군으로 하여 하나씩 검증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살펴볼 지번은 1977년 한국종교연구원 박종설이 펴낸 증산종단화보에서 주장한 신월리 540-2번지이다. 이곳은 1985년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에서 ‘증산교 객망리파’로 명명된 종교 단체의 부속 건물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부지의 위쪽인 542번지에는 ‘무극대도(無極大道)’란 현판이 걸린 채 스러져가는 사당(祠堂)이 위치하고 있다. 이 사당은 보천교 60방주 중 한 명이었다가 1923년 보천교를 탈퇴한 채경대(蔡京大)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동지들과 보천교를 탈퇴한 채경대는 1924년 음력 3월 성전 공사를 위한 상량식을 하고 1930년 동지에 증산신성(甑山神聖), 진묵대사, 주자를 ‘삼성(三聖)’으로 봉안하였다. 그의 교단은 삼성을 모셨기 때문에 ‘삼성교(三聖敎)’라 불렸다. 채경대는 이곳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개진하다가 1936년 신종교에 대한 일제의 폭압이 심해지자 교인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이 사당은 해방 이후 대구 출신 신언목(申彦穆, 1903~1984)에 의해 사용되었다. 신언목은 사당을 점거하고 증산의 향사(享祀)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따르는 사람이 수십 명이 되어 봄ㆍ가을로 내왕하면서 치성을 올리거나 송주를 위주한 수련공부를 실시하였다. 1985년 조사 기록에서 고(故) 손양호씨의 부인이 관리하고 있다고 하나 현재는 다 무너져가는 집과 무성한 잡초만 볼 수 있다.
540-2번지의 토지대장을 살펴보면 1924년 강백회(姜百會)
두 번째로 고찰한 지번은 현재 ‘강증산 상제 강세지(姜甑山 上帝 降世地)’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신월리 504번지이다. 이 지번은 위 문헌 조사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증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고 현재 강세지를 표명하는 간판이 걸려있어 일반적으로 이곳이 증산의 생가터인 걸로 알려져 있다. 현재 504번지는 바로 옆 지번인 412-1번지와 합쳐져 신송길 32로 되었으며 한 집에 속한다. 2012년 당시 412-1번지에는 유정자가 살고 있었는데, 유정자는 바로 증산의 양자인 강석환의 부인이다. 유정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영을 봉안하기 전 504번지 가옥에는 강석환의 당숙인 강천식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 강석환이 증산의 진영을 모시고 ‘강증산 상제 강세지’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강석환이 이곳에 증산의 진영을 봉안하고 현판을 걸어 강세지라고 알리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가 1978년 작성한 「무오동지 치성심고문(戊午冬至 致誠心告文)」이라는 글을 살펴보면 강석환은 도리어 이곳 504번지가 증산의 탄강지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다른 지번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上帝님이 九天에서 人世로 地上에 降臨하사 저의 姜氏 門中에 誕降하심이 姜門의 榮光이옵니다. 小子 不敏하와 歸天하신지 於焉 七十年이 되도록 이러타 할 孝行을 받들지 못하옵든 次 上帝님 誕生地인 現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 435의1 所在 聖地를 이제까지 他人이 領有하여 오든바 今日 冬至日 后에 小子의 名儀로 確保하기로 하고 힘자라는 대로 아버님 誕降地를 聖地化할 計劃이오니 아울러 心告하나이다.
인용문에서 보듯, 강석환은 증산의 탄생지를 신월리 ‘435의1 所在 聖地’로 특정하면서 그곳을 타인이 영유한 사정을 언급하였다. 즉 강석환은 435-1번지가 증산의 탄생지임을 알고 있었으나 사정상 그곳을 확보할 수 없어 골목 맞은편 당숙의 집인 504번지에 증산의 진영을 봉안하고 ‘강세지’라는 현판을 세웠던 것이다.
강석환의 발언 외 토지대장을 살펴보더라도 504번지는 증산의 생가터로 보기가 어렵다. 이 토지의 소유주를 살펴보면, 1927년 강우쌍(姜牛双)
세 번째로 고찰한 지번은 위 「무오동지 치성심고문」에서 언급된 신월리 435-1번지와 바로 인근 지번인 436번지이다. 이 지번은 2013년 7월 15일 당시 마을주민 전대식의 집터에 소속된 곳이다. 전대식의 가옥은 43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435-1번지와 436번지는 가옥의 마당에 해당한다. 435-1번지에는 창고 및 비닐하우스가 있고 마당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436번지는 집의 텃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대식과의 두 차례 인터뷰에서 증산 생가터에 관련된 중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문
전대식
문
전대식
문
전대식
문
전대식
문
전대식
위 내용에서, 전대식은 1906년생인 부친 전태식으로부터 증산의 생가터가 436번지라는 내용을 들었다고 하였으며 436번지가 증산의 생가터라고 주장하였다. 또 증산과 가족이 살았던 생가의 모습에 대해서는 작은 초가집으로 기어서 드나들어야 할 정도로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또 예전에는 437번지, 435-1번지에 가옥이 있었고 436번지는 밭이었으며 원래 27평 정도였으나 새마을운동 시절 길이 넓어지면서 6평 정도가 도로에 편입되었다고 하였다. 전대식은 두 지번의 토지를 매입하게 된 경우에 대해 “436번지 사람(경주 이씨)이 435-1번지 사람에게 팔고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고 그 다음 435-1번지에서 436번지를 산 후 이사갈 때 우리에게 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대식은 강석환이 자신의 부친 전태식으로부터 436번지의 땅을 사려고 하였으며 그곳에 비석(증산의 생가터임을 알리는)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한다. 또 부친 전태식이 강석환에게 토지를 팔지 않은 것은 가격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음을 말하였다.
위와 같은 전대식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여러 곳 중 436번지가 증산 생가터로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아닐까 한다. 전대식의 부친인 전태식이 1906년생으로 증산의 부친 강문회의 생전 인물인 점, 증산의 양자인 강석환이 436번지를 구매하려고 하였고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던 점 그리고 다른 이들의 증언과 경전 기록 등을 통해 436번지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고찰할 지번은 433번지이다. 이 지번을 증산의 생가지라고 지칭하는 증산 종단의 경전 및 종교연구 서적은 없으나, 1914년 일제가 작성한 토지대장에 이 지번의 소유주가 증산의 부친인 강문회(姜文會)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인 신월리 전체 지번 중 유일하게 강문회가 소유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토지대장을 살펴보면, 1914년 10월 10일 강문회(姜文會)
관련 경전 기록에 의하면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고 하여 증산이 1904년 음력 7월경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판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댁은 곧 증산 부친의 집을 말한다. 곧 증산은 천지공사를 위해 본댁의 살림살이를 팔아 이후 본댁의 가세는 크게 기울게 되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어느 종도가 상제의 본댁이 너무 협착함을 송구히 생각하여 좀 나은 집을 사드렸도다.”라고 하여 종도가 본댁의 곤궁함을 알고 증산의 부친을 위해 집을 사준 것으로 되어 있다. 종도가 집을 사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문회 명의로 등기된 433번지가 바로 종도가 사준 집일 가능성이 크다. 등기의 변천 과정을 추정해보면, 강문회는 1916년 서거하였으며 상속 과정에서 1918년 부인인 권양덕에게 이전되었다고 추정되며 같은 날 권양덕은 김성연(金成淵)에게 다시 이전 등기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증산도에서 편찬한 도전에는 김성연이란 인물이 증산의 종도로 등장하는데, 토지대장의 김성연이 바로 종도 김성연으로 추측된다. 이 추측대로라면 종도 김성연이 강문회에게 집을 사주고 강문회 서거 후 다시 돌려받은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증산의 종도가 본댁이 협소하여 집을 사주었다는 기록, 토대대장에서 김성연이 증산의 종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433번지는 증산의 생가터라 보기 어려우며 나중에 강문회가 이사하여 살았던 곳이라 짐작된다. 또 어떤 기록과 증언에서도 이곳이 증산의 생가터라 언급되고 있지 않다.
2. 증산 생가터 추정지
이상 살펴본 540-2번지, 504번지, 435-1번지, 436번지, 433번지 가운데 필자는 436번지가 증산의 생가터로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전대식 외 다른 이의 증언과 기타 경전의 기록이다.
먼저, 증언으로는 전대식 외에 강석환의 부인인 유정자가 436번지를 증산의 생가터라고 하였다. 1928년생인 유정자는 1944년에 당시 25세였던 강석환과 결혼하였고 강석환의 부친인 강영탁의 집(438-1번지)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그 집이 좁고 412-1번지에 빈터가 있어 이 번지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436번지를 증산의 생가터라고 말하는 유정자의 증언을 인용해본다.
우물 옆 작은 오두막에서 상제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지금은 터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작은 집이었고 사람들이 새로 집을 짓고 길도 나고 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남편에게서 우물이 옹달샘이었는데, 그 옆에 오두막같이 작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 사업한다고 거기가 길로 들어갔는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우물 위로 오두막집이 있었는데, 거기가 강세지라고 들었습니다. 새마을 운동할 때 길을 넓혔는데 그곳에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전대식 씨 집이 지금 새로 지으면서 넓혀서 그렇지, 봉춘댁이 사는 초가집하고 사서 합친 것입니다. 전대식 씨 집인지는 모르겠고 우물 위로 상제님 강세하신 곳이 있었다고만 들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물은 지금 있는 우물입니다.
위 증언을 종합해보면, 유정자는 현재 위치한 우물 옆에 작은 오두막집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고 그곳에서 증산이 탄강하였다고 말하였다. 436번지가 1979년에서야 전대식의 소유가 된 점을 감안할 때, 유정자의 발언에서 과거 당시 전대식의 소유가 아니며 우물 옆에 해당하는 곳은 436번지이다.
전대식과 유정자 외 인터뷰한 몇몇 인물들은 증산의 생가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작고하였다고 하였다. 일례로 2012년 말 당시 강영탁의 집이었던 438-1번에 살고 있던 강우상(이때 90세, 강영탁의 당숙)은 증산의 생가터에 대해 잘 모르며 “아는 사람은 다 죽고 없다.”고 하였고, 다른 마을 주민들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여러 경전 기록 가운데 증산의 생가에 대해 단편적으로라도 언급하고 있는 자료는 증산도에서 편찬한 도전 밖에 없다. 즉 다른 문헌은 증산 생가의 주소(대부분 신월리)만 언급하였을 뿐 가옥의 모습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물론 도전은 특정 교단에서 편찬한 경전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나, 가옥 구조와 우물 위치라는 지형적 단서 차원에서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도전에 나타난 증산 생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태어나신 후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외가와 진외가로 자주 옮겨 사시니라. 객망리에 사실 때의 집은 사립문도 없고 부엌은 볏짚으로 엮고 문은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더라.
객망리 집은 사립문도 없이 작은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데, 부엌은 볏짚으로 두르고 문은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더라.
본댁 마당에다 샘을 파심. 이 해에 하루는 손바래기에서 동무들과 놀이를 하시다가 갑자기 고사리 손으로 마당 한쪽 구석을 파시거늘 같이 놀던 아이들이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물으니 학봉께서 쳐다보지도 않으시며 그저 “샘을 판다.” 하시니라. 학봉께서 처음에는 맨손으로 긁으시다가 이내 복찌깨로 땅을 파시며 연신 “어서 물 나라, 물 나라.” 하시니 물이 날 만한 자리도 아니고 그리 깊이 파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에 정말로 샘물이 솟아나거늘 이를 본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하며 손뼉을 치니라. 후에 그 샘물은 동네 우물로 쓰이니라.
이 기록에서, 증산의 생가는 사립문도 없고 작은방 하나에 부엌 하나의 규모였으며 부엌은 볏짚으로 두르고 문은 대나무로 엮을 정도로 매우 가난하였다고 한다. 또 인용문에서 증산은 7세 때 집 마당 한쪽 구석을 파니 샘물이 솟아나게 되었고 이 샘물이 이후 동네 우물로 쓰였다고 한다. 이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 기록과 436번지가 원래 도로쪽으로 6평 더 넓었었다는 전대식의 발언 그리고 유정자의 발언을 종합해 보자. 그러면 현 우물이 도로에 수용되기 전 본래 436번지의 마당과 인접하므로 두 사람의 증언과 이 경전 기록이 합치된다. 또 증산의 생가가 매우 협소하였다는 증언과 기록을 통해서 볼 때 435-1번지의 대지보다 면적이 훨씬 적은 436번지가 생가터일 가능성이 높다. 일제가 1915년에 작성한 지적원도(첨부2)에서도 마을에서 대지로 표시된 지번 중 436번지가 제일 면적이 작고 또 436번지 바로 앞에 마을의 우물(井)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436번지의 토지대장에 증산의 부모 또는 증산의 성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등기 기록이 시작된 1914년 당시 앞서 밝힌 433번지를 증산의 부친인 강문회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즉 1914년에는 강문회가 살았던 곳(본댁)은 436번지가 아니라 433번지였다. 이러한 제반 정보를 종합할 때 결론적으로 436번지가 증산의 생가터로 가장 유력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강석환이 왜 1978년에 작성한 「무오동지 치성심고문」에 증산의 탄생지를 ‘435의1 所在 聖地’라고 기록하였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 간다. 이는 전대식씨의 2013년 8월 17일 인터뷰와 435-1번지와 436번지의 토지대장 기록을 고려해보면, ‘435의1 所在 聖地’는 ‘435-1번지에 속한 436번지’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전대식은 “436번지 사람(경주 이씨)이 435-1번지 사람에게 팔고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고 그 다음 435-1번지에서 436번지를 산 후 이사갈 때 우리에게 판 것입니다.”라 하였고, 토지대장 상 435-1번지의 경우 1914년 유치순(兪致淳)는 1914년 이화백(李化伯)보자. 436번지의 소유자 이화백은 435-1번지 소유자 유치순에게 매도하였고 유치순은 다시 435-1번지와 436번지 모두를 전대식에게 매도한 것인데, 436번지 토지대장 상에는 유치순으로 넘어간 기록이 빠져있다. 기록상 빠져 있지만, 1978년 동지 시기에는 436번지가 435-1번지에 살았던 유치순 소유였던 것이고, 그랬기에 강석환은 ‘435의1 所在 聖地’라여 436번지를 지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여러 내용을 종합할 때 증산의 생가터는 436번지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Ⅲ. 생가터의 종교문화적 의의
세계의 많은 저명한 관광지, 유적지 등이 종교문화와 관련이 있음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현재에도 살아 숨 쉬며 수많은 신앙인을 거느리고 있는 종교의 유적지는 성소로서 인식되고 기념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강력한 중심 공간으로 기능한다. 일례로 예수 탄생지로 알려진 베들레헴(Bethlehem)은 예루살렘 남쪽의 작은 도시이지만 수많은 신앙인들이 방문하는 성지순례지이다. 특히 예수가 탄생한 장소로 전해지는 동굴 위에 세워진 ‘예수탄생 기념성당(Church of Nativity)’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기독교 성당 중 한 곳이다. 이곳은 신자들에게 있어 지극한 성소(聖所)이자 거룩한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의 기성종교는 해당 종교 전통 내의 주요한 인물들의 탄생지, 수행지,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장소 등 의미 있는 장소를 성역화하거나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신종교의 경우 상대적으로 문화콘텐츠화 할 수 있는 종교 문화의 원형적 요소의 발굴과 활용이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다. 신종교의 실정과 관련하여 허남진은 지금까지 한국 신종교에서 성역화 한 성지에 대해 정리하여 그 양상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교조의 종교체험과 관련된 장소(천도교의 여시바윗골ㆍ용담정, 증산교의 대원사, 원불교의 영산성지), 둘째는 교조와 성인의 행적과 관련된 장소(천도교의 최제우와 최시형의 생가터ㆍ은적암ㆍ내원암ㆍ용담성지, 통일교의 범냇골, 증산교의 동곡약방, 원불교의 영산성지ㆍ변산성지ㆍ익산성지), 셋째는 교조와 성인의 유해가 묻혀있는 장소(증산교의 삼청전, 최제우의 태묘, 최시형과 손병희의 묘소, 원불교 익산성지), 넷째는 종교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천도교의 봉황각, 대종교의 청파호, 원불교의 영산 성지ㆍ변산성지ㆍ익산성지), 마지막 다섯째는 현세의 이상세계 건설지(통일교의 청평성지, 증산교의 용화동, 계룡산 신도안 등)을 언급하였다.
위의 내용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증산계 신종교의 교조인 증산의 생가터에 대해서는 정비ㆍ성역화ㆍ문화콘텐츠화 등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증산계 신종교는 국외에서 수입된 종교가 아닌 이 땅의 한국인인 증산 강일순에 의해 창시된 자생종교이자 민족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역설한 민족종교,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였던 민중종교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생가터에 대한 정비ㆍ복원은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증산 강일순과 관련된 종교문화는 정읍의 주요한 문화유산이며 더 나아가 전라북도 및 국가적 차원에서의 가치 있는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증산 생가터를 정비ㆍ복원할 때 향후 어떠한 가치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첫째, 신앙인들에게 증산 생가터는 주요한 성지 순례지로 기능할 수 있다. 종교적 인간은 본원적 성스러움과 더 가까워지려는 욕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이 충족될 수 없을 때 직접 성스러운 존재가 현현하였던 공간을 찾아 떠나게 된다. 곧 순례는 성스러운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으로 종교적 인간ㆍ공간ㆍ성스러움 이 세 요소가 어우러져 완성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증산의 활동지인 정읍은 수많은 신앙인들이 찾고 방문해오고 있는 순례지이자 성지이다.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이 교단의 본부를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로 하면서 일제강점기 정읍은 수백만 신도를 거느린 대교단의 중심지였다. 1922년 음력 7월에 차경석의 모친 장례식이 열려 수만 명이 장례 행렬에 참석하였고 교단에서 식표를 내어 식사를 공급하였는데 식표수가 총 45만여 장이었다고 한다. 1929년 음력 4월말에는 정읍 보천교 본부의 십일전(十一殿)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북한의 신안주역(新安州驛)에 매일 100여 명씩 기차로 정읍으로 향하려는 신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하며, 김천에서도 정읍으로 향하는 보천교도가 쇄도한다고 하였고, 정주(定州)에서도 정읍을 찾아갔다 돌아오는 보천교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보천교 다음으로 교세가 컸던 무극도(无極道)도 1925년에 정읍군 태인면 태성리에 도장을 준공하며 종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는 정읍의 명승지 중 하나로 무극도 도장의 사진을 게재하며 “동면 태흥리 1등 도로변에 2-3층의 화려한 누각이 공중에 우뚝 솟아있으니, 이것이 즉 무극도 본사이다. 그 웅장함은 보천교 본부와 조금 차이가 있으나 구조의 정교함은 그에 별로 손색이 없다. … 건물의 명칭은 중앙의 3층은 도솔궁, 2층은 영대라 하고 부속건물 수십 동이 있으니 그 장치의 찬란함이야말로 참으로 장관이다. 역시 원근 각지의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소개하였다. 이렇듯 정읍에는 보천교와 후속주자인 무극도가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문은 이를 비꼬아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을 차천자로 무극도의 교주 조철제는 조천자라 부르면서 “一郡에 所謂 天子가 둘이나 잇는 곳은 아마 朝鮮에도 井邑이엇슬 것이다.”라 하기도 하였다. 위의 기록 등에서 일제강점기 정읍은 증산 신앙운동의 산실, 구심점, 성지, 순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유사종교로 핍박받고 해산되었던 증산 종단은 해방 이후 다시 일어났다. 여러 증산 종단의 신도들은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정읍 및 인근 성지를 순례하여왔다. 특히 근래에는 증산 종단 가운데 가장 큰 교세를 지닌 대순진리회 신도들의 종교 활동과 순례지 방문이 활발하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증산의 생가가 위치한 덕천면 신월리, 증산이 공부하였다는 마을 뒤편의 시루봉, 증산이 방문하였던 여러 직계 종도들의 집터 등을 순례하며 증산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즉 증산은 과거에 국한된 역사 인물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삶에 생생히 현현하여 영향을 미치는 성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정확한 증산의 생가터를 고증하고 이를 정비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종교문화유산으로 변모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 증산을 단지 신앙인들의 숭앙 대상으로서의 증산이 아니라 비신앙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인물로 설정하고 기존 정읍 지역의 여타 종교문화콘텐츠와 융합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문화콘텐츠를 양산할 수 있다. 동학의 최제우ㆍ최시형ㆍ손병희를 단지 동학 교단에서 신봉하는 인물에 한정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던 선각자이자 위인으로 보듯이 증산 또한 비신앙인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또 주지하다시피 정읍은 고부 동학농민운동의 중심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매년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었는데, 향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로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정읍은 동학의 중요한 상징성을 더욱 확보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학이라는 상징을 가진 정읍에 증산 신앙의 모태이자 중심지라는 특성을 결합함으로써 정읍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향상 발전시킬 수 있다. 실제 증산은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발발과 실패의 참상을 목도하였으며 이후 세상과 창생을 구원하기 위한 대의를 세우고 이를 위한 종교적 작업으로 1901년부터 천지공사를 시작하였다. 증산의 종도들도 증산을 추종하기 이전 동학군에 가담하였던 이들이 많았고 특히 증산은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을 천하를 움직인 만고의 명장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동학과 증산은 주요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동학이 단지 정읍지역에 국한된 동학이 아니라 우리 민중을 크게 울렸던 동학이듯이, 증산에 대한 신앙운동이 정읍에서 싹을 틔웠지만 그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한다면 지역성과 특수성을 넘어 그 보편성을 널리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Ⅳ. 결론
증산 강일순은 증산을 신앙하는 신도들에게는 신성한 존재ㆍ권능자ㆍ구원자로서,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종교 운동을 개시한 ‘종교적 천재(Religious Genius)’이자 민족의 시련과 아픔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민족종교운동가로 또 민중의 억압과 압제를 해방하고자 하였던 민중종교운동가로서 인식되고 있다. 근래에는 역사학계에서도 증산계 교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으며 철학계에서도 근대의 주요한 사상가로서 증산을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증산이 탄강하여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던 정읍은 증산의 숨결과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청년 시절의 증산은 고향 마을에서 벌어졌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발전 그리고 쇠퇴와 참상을 목격하였다. 이후 증산은 광구천하와 광제창생의 대의를 세웠으며 생가 뒤편의 나지막한 산인 시루봉에 올라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증산의 생가지를 중심으로 한 정읍 지역은 증산이 발자취가 다분한 곳으로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킬 만한 종교문화적 요소가 풍부하다.
이런 점에서 정확한 증산의 생가터를 고증하고 이를 정비ㆍ복원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본론에서 밝혔듯이 현재 ‘강증산 상제 강세지’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증산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는 신월리 504번지는 증산의 생가터가 아니다. 몇 군데 후보지가 있지만 주요한 인물들의 증언과 문헌 기록을 통해서 볼 때 436번지가 생가터로 가장 유력하다.
현재 이 지번에는 증산의 생가터라고 할 수 있는 아무런 표식이 없으며 제대로 된 관리나 정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곳을 정비 또는 복원하여 문화콘텐츠화 할 때 상당한 의의와 기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첫째는 증산을 신앙하는 신도들의 주요한 순례지가 될 수 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방문과 순례가 지속되고 있지만, 보다 체계적인 정비와 관리가 이뤄질 때 정읍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의 주요한 종교적 성소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증산을 중심으로 한 종교문화콘텐츠를 정읍 지역의 동학콘텐츠와 연결하여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곳은 특정 종교단체의 성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읍의 향토문화유산 더 나아가 근대문화유산이나 문화재로 성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즉 종교라는 특수성과 정읍이라는 지역성을 넘어 대중성과 보편성을 지닌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부 록
부 록
첨부 1. 전대식의 증언으로 그린 증산 생가터 추정지
첨부 2.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부산기록관 소장, 1915). 436번지는 마을 중심부에 위치한다. 지도상에서 436번지 오른쪽 바로 옆에 우물(井)이 위치한다.
첨부 3. 위 지도 확대
신월리 현 지번(네이버 지도)
첨부 4. 戊午冬至 致誠心告文 첨부5. 17쪽 내용 일부
첨부 4. 戊午冬至 致誠心告文
첨부5. 17쪽 내용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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